[큐브인물] 문학 청년 신격호, 유통으로 창대했고 후계문제로 미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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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인물] 문학 청년 신격호, 유통으로 창대했고 후계문제로 미약했다
  • 최연훈 기자
  • 승인 2020.01.19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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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19일 세상을 떠났다.

신 명예회장은 한국 유통 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 창업 1세대 중 마지막까지 살다 간 인물이다.

롯데그룹은 신 명예회장이 이날 오후 4시20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신 명예회장은 주민등록상으로는 1922년생으로 만 97세지만, 실제로는 1921년생으로 99세다.

- 청년 신격호 83엔으로 시작... 국내 재계 5위 그룹 신화

신 명예회장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 경상남도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빈농 집안의 5남 5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돼지 사육을 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1942년 만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격호가 마주한 현실은 배고픔이었다. 수중에 면서기 두달치 월급인 83엔을 갖고 있었지만 단신으로 객지생활을 해야하는 입장에서 함부로 꺼내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친구집에 반년을 얹혀 살았고 우유배달, 신문팔이, 허드렛일로 생활비를 벌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구입한 문학서적에 빠져 작가의 길을 걸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롯데라는 사명도 독일 문학가 괴테가 쓴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샤롯데)에서 따왔다.

청년 신격호는 일본에서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다. 우연히 만난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신격호를 높게 평가해 사업자금으로 5만엔을 빌려준다. 신격호는 이 돈으로 1944년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운다. 하지만 공장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하고 불타버린다. 5만엔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이 대거 귀국했지만, 신격호는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다’며, 우유 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 그는 당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도 배달 시간을 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배달 시간이 정확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신 명예회장 앞으로 우유 배달 주문이 크게 늘었다.

이렇게 모든 돈으로 그는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짓고 비누 크림 등을 만들어 팔았다. 사업이 잘 되어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았다. 신격호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하나미쓰에게 빌린 자금을 모두 돌려주면서 고마움의 표시로 집까지 한 채 사 주었다고 한다.

롯데는 1948년 도쿄에서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신격호는 풍선껌을 만들어 대박을 냈다. 당시 일본에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껌 제조업체 약 400개가 난립했다. 그런데도 신격호의 껌이 일본시장을 장악한 건 품질에 대한 고집과 과감한 마케팅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격호는 화학제품인 초산비닐수지 대신 남미산 천연수지를 사용해 껌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원료를 구하기 어려워 초산비닐수지를 썼지만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 덕에 구멍가게 주인들이 공장 앞에서 물건을 받아가려고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풍선을 부는 재미를 주고, 미스롯데를 선발해 무개차에 태워 도쿄 시내를 누비게 하는 등 여러 이벤트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960년에는 껌 구입시 1000만엔을 받아갈 수 있는 추첨권 제공 행사를 벌여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그 무렵 일본의 월평균 가계 수입이 2만5000엔 남짓이던 때다. 나중에 일본 공정거래위원회가 과다한 경품제공을 금지하는 조치에 나설 정도였으니 당시 롯데가 일으킨 반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행사로 롯데의 매출은 두 배로 뛰었고 껌 시장에서 부동의 1위로 올라섰다.

일본에서의 사업이 자리를 잡자 신 총괄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신 명예회장은 1966년 한·일 수교로 투자의 길이 열리자 사업을 한국으로 확장해 1966년 롯데알미늄과 1967년 롯데 제과를 설립했다. 롯데는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빠다쿠키 등 히트 상품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음료·빙과회사를 인수하는 한편, 관광·유통·건설·석유화학 사업에도 진출했다.

1973년에는 서울 소공동에 지하 3층, 지상 38층 규모의 롯데호텔을 준공했다. 1974년과 1977년에는 칠성한미음료와 삼강산업을 각각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79년에는 롯데호텔 옆에 롯데백화점을 열고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평화건업사(현 롯데건설)와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후 1980년 한국 후지 필름, 1982년 롯데 캐논·대홍기획 등을 설립하며 사업 영역을 넓혔다.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고, 연이은 인수·합병(M&A)을 통해 오늘날 국내 재계 서열 5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껌기적을 일궈낸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왕국’으로 일궈낸 것이다.

-승승장구 신격호, 후계자 문제로 훅 가라 앉았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의 시대는 2015년 7월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신동빈 회장이 2015년 7월 16일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이사회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돼 한·일 롯데의 ‘원톱’ 자리에 오르자 형인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 명예회장을 앞세워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신동빈 회장을 해임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쿠데타에 동참한 신 총괄회장은 자신의 의지건 아니건 결국 이 사건으로 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전격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신 명예회장은 2016년 호텔롯데 대표와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 사내이사에서 물러났고, 2017년에는 롯데쇼핑·롯데건설(3월), 롯데자이언츠(5월), 일본 롯데홀딩스(6월), 롯데알미늄(8월)이사직을 내려놓았다. 한·일 롯데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한국에서 50년, 일본에서 70년 이어진 '신격호 시대'에 마침표를 찍힌 것이다.

형제의 경영권 다툼으로 인해 신 총괄회장의 치부도 드러났다. 두 사람이 후계 문제를 다투는 과정에서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법원의 성년후견인 지정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신 총괄회장이 2010년부터 치매약을 복용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신 명예회장은 정신감정을 이유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나흘만에 무단으로 퇴원하기도 했다. 결국 2016년에 한국법원은 신 명예회장의 한정후견인으로 법무법인 원 소속인 사단법인 선을 지정했다. 당시 한정후견 신청은 신 명예회장의 여동생 신정숙씨가 냈다.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 재선임안이 주총에 상정되지 않은 것도 한국 법원의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신 총괄회장의 불명예 퇴진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일에 욕심을 내다 후계구도 정리 시점을 놓쳤다는 지적이다. 2011년 신동빈 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이 회장에 오르면서 신격호 회장은 ‘총괄회장’에 올랐다. 후계 구도를 정리하지 않고 ‘영원한 현역’을 자처한 것이다. 당시 롯데그룹은 "양국을 오가며 활동해온 신 회장은 총괄회장 취임 후에도 양국에서 업무보고를 받고 경영 현안을 직접 챙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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